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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______ 국악, 대안 찾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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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를 중심으로 '이희문다운 소리'를 보여주자는 취지 아래 시작된 이희문의 신작 '이희문프로젝트 <요(謠)>'가 쇼케이스를 올린 지 3개월 만인 2025년 3월 세종S씨어터에서 공개되었다. 공연에서 밝힌바, 그에게 이번 프로젝트는 파격적인 의상과 퍼포먼스를 즐겨 했던 기존의 행보를 잠시 멈추고 다시 전통에 집중해 보는 올해의 목표, 그 시작점이다.
'2025 이희문프로젝트 <요(謠)>'는 전통적인 민요의 재현이 아닌, 민요가 가진 서사와 감성을 이희문다운, 이희문스로운 작업으로 재해석하고자 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희문이 짓는 표정, 움직임, 소리의 느낌으로 하여금 이희문다운 소리라 하는 특유의 익살스러움과 장난스러움. 그리고 애틋함이 전달되었다. 또 음악감독과 사운드퍼포밍을 맡은 임용주가 곡 전반에 모듈러신스를 함께 연주하면서 경기민요의 원본을 크게 헤치지 않으면서도 '민요의 경계를 확장*'시키고,'민요의 진정성과 새로움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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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현대', '전통의 재해석과 확장'으로 쉽게 포장되곤 하는 것이 오늘날의 국악이다. 전통의 기본 원형에서 조금의 편집만 행해지면, 전통의 요소가 가미되면, 타 장르와의 이종교배가 이루어지면, 쉽사리 '융합, 재해석, 확장, 미래'와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이러한 수식어는 선조로부터 내려온 전통과 다르다는 면에서 얼추 정당하다. 하지만 실상은 오랜 시간 국가기관과 홍보 문구로 포장된 발명품에 불과하며 새로워 보이게 하는 획책에 지나지 않는다.
국악이라 불리는 한국 전통음악은 대중화라는 목표지향적 시스템하에 편집과 타 장르의 포섭, 이와의 교배가 오랜 시간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방향성은 일제강점기 이후 정부 수립과 동시에 갖춰진 국가기관과 부속시설에 의해 국악이 제도화되면서 적극적으로 시작되었다. 국악의 보존과 근대화가 시급하다는 이유로 대안을 찾았고, 그것이 서양음악 도입이다. 마침 타지에서 들여온 문화들이 주류를 이루기도 했고 그들의 눈에는 국악이 위기로 보였던 것 같다. 전통음악의 관객 점유율이 현저히 떨어지고 관심 또한 낮아진 마당에 새롭게 발명된 국악은 고루한 지난날의 국악과 달라 국악계와 관객에게 신기함을 자아냈다. 일시적이나마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말 그대로 일시적인 효과에 불과함을 우리는 과거를 되짚으며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 또한 과정이지" 등의 안일함과 적당한 둘러대기로 대안 찾기를 지속하고 있다. 그럴듯해 보이는 발명품의 성능에 환호하며 정작 중요한 '왜'는 차치해둔 채.
서양음악을 적극 반영해 형식을 변형한 '국악관현악' 발명품 후에도 대안은 여럿 생겼다. 그중 다른 예술 장르를 포섭하는 전략으로 재즈가 대표적이다. 외에도 보사노바, 록, 팝 등 다양하다. 짐작해 보면 시기마다 유행하는 대안이 있는데, 요즘 유행하는 대안(예술 장르)은 전자음악 같다. 음고가 없거나 음색이 한정된, 여러모로 제약이 큰 국악기의 폭을 넓힐 수 있고, 퓨전국악이라 불리는 이제는 고루한 창작(발명)을 탈피할 수 있는 열쇠로 전자음악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유행일 뿐, 재료를 빌려 쓰는 행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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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문의 '이희문프로젝트 <요(謠)>'로 돌아가 보자. 이희문의 이희문다운 소리는 민요 창법 그대로를 사용해 전통성이 강하게 두드러지면서도 상당히 펑키하다. 민요가 가진 맛이 있는 그대로 보여 원색이 크게 무너지지 않는 데다가 현대에 익숙한 사운드들이 가미되면서 이색적인, 그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이 탄생한다. 전통의 원형이 남아있고 두루두루 잘 직조된 결과물은 독창적이라는 평과 함께 기념비적인 예술가가 되게 했다. 앞선 필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 또한 발명품에 불과할 수 있겠지만, 그가 만들어온 행보를 굳이 지적하진 않겠다.
문제는 전통에 더 집중하겠다는 올해의 시작이다. 이희문은 <요(謠)>(편의상 축약하겠다.)에서 긴아리랑, 양류가, 한강수타령 등 경기민요의 여러 면모를 볼 수 있는 셋리스트를 구성했다. 그리고 곡 전반에 걸쳐 임용주가 모듈러 신스를 얹었다. 곡에 따라 이희문의 소리를 루프 하기도 하고, 앰비언트 레이어나 노이즈 텍스처 등의 효과음을 배경으로 채웠다. 관객의 반응 역시 좋았다. 전통에 집중하겠다는 말이 맞았구나, 하는 확신의 끄덕임과 박수로 공간은 가득 들어찼다. 하지만 <요(謠)>는 전통의 기계적 병렬에 불과했다 본다. 전통에 집중하겠다는 말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도 그간의 걸음에 큰 해가 되지 않도록 한 묘책이 아닌가. 전통을 부각하고 집중한다는 것이 요소를 간소화하고 나란히 늘어놓는 일차원적인 방법으로 귀결되는 것은 전통을 수단화하는 과거의 반복과 다를 바 없다. 경기민요 그대로를 보여주되 더 감각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전자음악 술책은, 그저 낯선 요소들을 매끄럽게 연결하고 세련된 질감인 양 빈틈을 감추며 병렬적 구조를 정당화하는 역할일 뿐이다. 이것이 큰 환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악 발명품 계의 깊이 깔린 관성적 환호와 이희문이라는 이름의 권위였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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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계는 여전히 대안을 찾는다. 누구도 손대지 않은 것이 무엇일까, 어떤 게 새로운 것일까, 소위 말해 있어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등. 여타의 연유로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대안 찾기는 임시적인 방책일 뿐, 결국 대안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이자 장식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 또한 소모되는 콘텐츠에 불과하다. 일제강점기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반복적인 굴레에 빠져 매번 다른 외피만을 덧씌우고 갈아입는 식의 방식을 쫓고 있다. '새로운'이라는 그럴듯한 말에 속아 정작 그 안에 있어야 할 맥락의 부재는 간과한다. 국악계 스스로가 대안의 소비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되풀이를 하는 것이다. 계속되는 대안 찾기는 우리 스스로 국악을 지우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새로움'이라는 명분 아래 행해지는 무분별한 발명보다는 그 '새로움'이라는 말이 무엇을 소외시키고 있는지를 직시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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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어느새 새로움이 익숙해졌다. 이 말은 역설적이지만 오늘날 한국의 전통음악, 국악뿐 아니라 대중음악 전반에 걸쳐 두드러지는 현상을 단적으로 설명한다. 국악계는 오랜 시간 '전통의 현대화', '재해석', '확장'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실험을 반복해 왔다. 이 전략은 처음에는 실제로 새로운 시도로 받아들여졌지만, 반복되며 하나의 방식, 하나의 장르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새로움이라기보다 '새로워 보여야 한다'라는 강박의 다른 이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흐름은 국악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현재의 대중음악, 특히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K-POP 씬에서도 매우 유사한 구조로 작동하고 있다. 누가 먼저 시도했는가, 누가 손대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했는가의 경쟁 속에서 '대안'은 너무 쉽게 소모된다.
K-POP은 단순한 음악 장르를 넘어 '새로움'이라는 이미지를 꾸준히 생산하고 재포장해 내는 산업이 되었다. 탈춤의 몸짓을 응용한 안무, 한복을 재해석한 스타일링, 국악기 샘플링을 얹은 트랙 등 그것들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맥락 없이, 얼마나 빠르게 다음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가이다. 국악계가 전자음악과의 결합을 '혁신'이라 부르듯, K-POP에서도 기술과 장르의 혼종은 반복되는 문법이 되었다. 모듈러 신스, AI 작곡, 메타버스 세계관, 디지털 휴먼 캐릭터의 활용은 음악 그 자체의 내적 동기보다 외적 기획의 아이디어로 먼저 움직인다. 더 낯설게, 더 독특하게, 더 처음처럼 보이기 위한 이 강박은 어느덧 창작의 본질보다 외형과 소비 가능성에 집중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최초', '파격', '혁신' 같은 수식어는 실질보다 인상을 앞세우며 전통과 익숙함을 빠르게 밀어낸다. 대안 찾기는 필요하지만, 고민 없는 소비 구조 안에서는 장식처럼 소모될 뿐이다. 결국 '새로움'은 쉽게 대체되는 일시적 콘텐츠가 되고 반복은 계속된다. 우리는 묻고 직시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새로움을 말하며, 그 말이 무엇을 지우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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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은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묶여 있지만 그 실체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었다. 조선시대의 궁중악에서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형성된 근대 국악, 그리고 지금의 퓨전국악에 이르기까지 국악은 수많은 변형과 실험을 거쳐왔다. 그러나 그 변화의 과정은 ‘지켜야 한다’는 보존의 명분과 '새로워야 한다'는 대중화의 필요 사이에서 늘 갈등을 겪어왔다.
오늘날 국악은 여전히 새로운 옷을 입고 있다. 전자음악, 재즈, 팝, 무용, 영상 등 다양한 장르와 결합하며 확장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과연 전통을 새롭게 만드는가, 혹은 새로움이라는 장식을 입은 또 다른 소모품을 만들어내는가 하는 물음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전통의 맥락과 철학 없이 그저 새롭기만 한 실험은, 결국 국악의 본질이 아닌 겉모습만을 바꾸는 일에 그친다.
'국악은 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장르 분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과거를 기억하고 어떤 감각으로 미래를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국악은 단지 옛 음악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감정과도 연결될 수 있는 살아 있는 언어다. 하지만 이 언어를 우리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또 어떤 태도로 다루고 있는지는 여전히 자문해야 할 과제다.
국악의 미래는 새로움에만 달려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새로움이 무엇을 잃게 만드는지,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데서 시작된다. 익숙한 낯섦을 좇기보다는, 국악이 담고 있는 오래된 정서와 이야기의 깊이를 다시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전통의 현재화'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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